10화 끝나고 뛰쳐나온 멜린윈의 시점에서 써본 글입니다. 설정이라든지, 이상한 데가 있으면 지적 주시길.


거리로 나오면서 멜린윈은 문득 목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처음 인장 반지를 목에 걸었을 때는 그 묵직한 느낌이 몸에 쉽게 익지 않았었다. 익숙하지 않은 무게, 목에 가끔 선뜻한 목걸이의 감촉이 새로 얻은 책임만큼이나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이제는 그 무게를 내려놓은 홀가분함이 오히려 목덜미를 짓눌러왔다.

난민 구역의 거리를 걷는 동안 건물 사이와 골목에는 바람이 몰아쳤다. 이곳 가난한 사람들의 땅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정처없이 헤매는... 오가는 사람들과 반가이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녀는 숄을 더 바짝 여몄다. 허전한 목덜미에 바람이 닿지 않게, 혹여라도 인장 반지가 없는 것을 눈치채이지 않게.

마주하는 얼굴마다 순박하거나 천진한 미소 뒤에 비웃음을 숨긴 것만 같았다. 동료를 속인 거짓말쟁이라고, 비겁하게 가난을 핑계대고 불법을 눈감는다고, 이래서 게으른 가난뱅이는 안 된다고. 결국 그 시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멜린윈은 옷을 휘날리는 바람에 휩쓸리듯 걸음을 옮겨 인적이 뜸한 골목에 들어섰다.

'죄도 짓는 사람이나 짓는 거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손으로 눈을 비볐다. 루카양에게, 게렌씨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입안에 맴돌며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보고 겪은 것들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되지도 않는 도둑질을 하다가 시체가 된 젊은이를,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어린 소녀를, 먹을 것이 없는 집에서 밤에 슬그머니 나와 강으로 향하는 할머니를. 약을 지어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볼에 입맞추고 손을 잡고 노래를 불러줘도 결국은 그렇게 죽어질 육체들. 어떤 약으로도 가난만은 끝내 치료할 수 없었다.

'나는 너희를 그렇게도 윽박질렀는데.'

누구든 어느 선을 넘으면 견딜 수 없는 한도는 있었다. 총기어린 눈빛을 빛내는 크렘에게는 아버지가 얻어맞고 몸져누운 것이 그 마지막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분노를 그렇게 꾸짖고 나서 언젠가부터 그 검은 불길은 자신에게 옮아온 걸까. 그리고 알키는...

알키는.

어디까지 왔는지 깨달으면서 멜린윈은 우뚝 멈춰섰다. 식량창고 습격이 있었던 다음날 새벽, 알키가 나오는 것을 본 바로 그 골목에 와 있었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공동주택의 2층 창문이 보이리라. 유달리 추웠던 새벽 눈을 비비며 일어나 내다보았던.

이거 신지기님도 받아두십쇼. 손에 잡히던 밀가루 자루의 묵직함. 그 의미를 견딜 수가 없었던 멜린윈은 내팽개치듯 알키에게 돌려주었었다. 그리고 그 바보같은 젊은 녀석은 그 무게를 짊어지고 곧바로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멜린윈은 천천히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픔처럼 시린 그 푸른 공허 속에서 그녀는 차가운 바람에 날리는 한 점 티끌이었다. 그녀를 땅에 붙잡아두는 의무와 관계의 무게 없이 자유롭고, 막막한.

'이제 편해졌니? 죽으면 가볍고 홀가분해?'

더  이상 없는 사람에게 말없이 물으며 멜린윈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햇살이 따사롭고 환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도 무거운데...'

그녀는 인장 반지가 없는 목줄기에 손을 대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금 목과 손과 팔과 머리, 약간 출출한 배와 뒤늦게 후들거리는 다리가 있는 멜린윈이 되었다. 스러질 육체, 삶의 무거움.

햇살에 금빛으로 물들어 떠도는 먼지를 그녀는 눈부시게 보았다. 어쩌면 그때 그 강변에서 흘려보낸 알키의 재일까. 그리고 입 하나라도 덜려고 밤중의 새까만 강물에 들어간 할머니, 굶주림으로 얼굴이 퀭한 채 자다가 조용히 숨이 멎었던 여섯 살바기도 함께 있을까. 산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 홀가분한 평화.

'루카양... 당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죠. 아니, 이해해선 안 돼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바람은 그녀를 밀어내듯 허름한 공동주택을 향해 불었다. 결국 멜린윈은 파란 하늘과 햇빛을 등뒤로 하고 건물 입구에 천천히 들어섰다. 그늘진 계단을 올라가면서 익숙한 공포와 다시 싸워야 했다.

'왜 우리들이 범죄자가 되는지,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고, 어떤 심정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지.'

집 문앞에 서서 그녀는 안에 인기척이 있나 가만히 귀기울였다. 귓가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 언제나 그렇듯 선뜻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니까 루카양은 옳을 수 있는 거에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서 사람은 변해가니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중요하지 않아져서...'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멜린윈은 입을 막았다. 습관처럼 차오르는 비탄을 내리누르면서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달래야 했다. 그날 이후 감시하는 눈길들이 있으니까 또 같은 일이 벌어질 리는 없다고. 안에 들어가면 아들이 맞아줄 거라고, 아니면 놀러나간 어린 소년이 남기고 간 어수선한 집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해야 견딜 수 있었다.

새로 자물쇠를 단 문을 따는 손이 떨려왔다. 땀이 난 손을 옷에 문질러 닦으며 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엄마?"

자리에 누워 선잠을 자다가 졸리게 맞아주는 그윈을 보며 멜린윈은 안도감에 오히려 가슴이 무너졌다.

"우리 꼬맹이 벌써 자?"

문을 닫고 꼭 잠근 멜린윈은 그윈이 누운 자리 옆에 가 앉았다. 보드라운 검은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마치 환상이 아니고 실재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하듯. 대답 대신 그윈은 커다랗게 하품하며 멜린윈의 체온을 향해 꼬물꼬물 다가누웠다. 이마를 짚어봐도 열은 없었다. 밤에 잠을 안 잔 걸까. 요즘 한동안 제대로 신경도 써주지 못하고... 가슴이 작게 찌르듯 아파왔다.

"우리 꼬마... 내일은 좀 지겨워도 엄마랑 같이 있자. 이제 시간 있으니까."

멜린윈은 아들을 끌어다가--언제 그위나드가 이렇게 무거워지고 키도 커졌을까--품에 가득 안았다. 항의하듯 작게 뒤척거리던 그윈은 편한 자세를 찾았는지 따뜻하고 무겁게 푹 기대왔다.

"같이 글도 읽어보고, 과자도 굽자. 이젠 좀 컸으니까 엄마 약 만드는 거 도와줘도 돼. 칼은 아직 안 되지만."

그윈의 머리에 입맞추고 등을 토닥여주다가 멜린윈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넌 글 읽는 게 지겨워서 꼼지락거릴 테고, 부엌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작업은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더 하다가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하면 나가고 싶어 안달하겠지. 난 처음에는 짐짓 엄하게 다 치우고 가라고 하다가 결국 보내줄 테고, 넌 혹시 내 마음이 변할까 쏜살같이 달려나갈 거야. 에이그, 요녀석. 요 말썽꾸러기 같으니."

그윈이 그날 이후로도 상처 없이 해맑다는 사실에 그녀는 매일같이 감사했다.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와중에도 알키가 준 마지막 선물이리라. 그 차가운 새벽, 손에 잡혀오던 밀가루 푸대의 묵직함처럼.

창밖에는 난민촌의 지붕 위로 하늘이 천천히 저물어갔고, 거리에는 망자의 기억이 바람에 맴돌았다, 아들의 졸립고 따스한 무게와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안고 멜린윈은 이제는 없는 고향의 노래를 나지막히 불렀다. 조금씩 익숙해가는 목덜미의 허전함을 지우고도 남는 품안의 온기, 자신을 이 땅에 붙들어두는 그 모든 것의 무게를 느끼며.
Posted by lokisdottir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애스디 2008.07.31 2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 저리도록 섦고 쓸쓸한 글이로군요.

    "어떤 약으로도 가난만은 끝내 치료할 수 없었다."
    란 구절이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제 멜린윈의 선택은 어디로?)

    • lokisdottir 2008.08.01 0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ㅋㅋ 약으로도 가난은 치료할 수 없었다는 말은 사회봉사를 하는 의사가 했던 말인 듯도 해요. (기억이 부정확해서 제가 정말 생각해낸 말일지도 (?)) 멜린윈의 행로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보겠습니다.

    • 애스디 2008.08.01 1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허허. 멜린윈의 선택은 플레이에서 기다리겠습... (어서 돌아오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