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은 고달프다
실피에나에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죽은 사람뿐입니다. 삶에는 항상 견디거나 이겨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할 수도 있고, 가족이 위독할 수도 있고, 장사가 잘 안될 수도 있고, 자기가 책임지는 부하들이나 동료들의 생계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빈털터리 유랑민에서 돈 많은 귀족이나 출세한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전부 크고 작은 고충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 위해 행동합니다. 사람에 따라 "자기의 삶"이 때로는 "가족의 삶"이 되고, "마을의 앞날"이 되고, 나아가 "실피에나의 미래"가 되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도리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빵을 훔치기도 합니다. 달리 살 길이 없어 산적이 되거나 남을 속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피에나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있습니다. 단지 뚜렷한 것이 없고 헛갈리기 쉬우며,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아가는 일이 많을 뿐입니다.
이런 면은 NPC를 설정하고 운영할 때 반영하면 좋습니다. 악당이 악당인 데에는 이유가 있고, 선량한 사람이 선량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갖게 되는가는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정해집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택하는가는 선택의 여지로 어떤 것이 있는가에 따라 정해집니다. 이런 조건들을 변화시키면 사람의 행태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PC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다면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무엇이 좋고 나쁜지 알기 어렵다.
우르고로스 화산이 폭발하고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나쁜 일일까요? 그러나 그 덕분에 내전시대가 끝났습니다. 좋은 일일까요? 그러나 그 덕분에 실피에나는 동서로 갈렸습니다. 나쁜 일일까요? 루피나 백작이 서부 실피에나를 통일했지만, 당초에 내전시대를 가져온 원인인 팔레나트가 그 뒤에 버티고 있습니다. 에르네스 사령관이 동부에서 농민혁명을 일으켰지만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정치는 아직도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루피나는 외세로부터 되도록이면 독립하려고 애쓰고 있고, 에르네스도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고 정치를 안정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이것은 화산폭발이나 혁명과 같은 큰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개인의 신변도 어지럽기 마련입니다.
답은 결과가 나와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가까지가 과정이고 어디부터가 결과인지는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를 저울질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믿는 바에 따라 선택하고서 그것이 옳기를 비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실피에나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말을 "미리 정해져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뜻으로도 쓰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가능성"이라는 뜻으로도 씁니다. 전자가 보통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체념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희망을 뜻합니다. 두 의미를 합하면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앞서 말했듯 지금의 실피에나는 사람들의 삶이 고달프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도 불확실한 세상입니다. 눈을 돌리면 어느 곳에나 빈곤과 질병, 폭력이 있습니다. 백작부와 혁명정부도 그 내부에는 종양이 자라고 있고 배후에는 외세가 있습니다. 아직도 서로 투쟁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그늘에서는 나라의 패권을 노리는 자들도 있으며, 그저 한 몫 잡아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코 밝고 아름다운 사회는 아닙니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여지는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밝은 미래를 막연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조차 "그래도 717년보다는 낫다" 또는 "그래도 내전 때보다는 나은 점도 많다"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앞으로 상황이 계속 나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상황은 분명히 안 좋고, 더 나빠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기대를 품을만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파괴도 있지만 재건도 일어나고 있고, 부패도 있지만 그 틈에서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 개인과 사회
실피에나의 현재는 안정된 시대가 아닙니다. 붕괴한 기존 체제의 잿더미 위에 질서의 싹이 다시 트려고 하는 격동기입니다. 제2장의 설정은 대부분 그런 혼란에 따른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이런 문제의 영향을 받지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이런 문제를 단지 피하려 들거나 이를 이용하려 할 뿐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거나, 이미 그로 인하여 이득을 보고 있어 해결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손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덕 상인이 장악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상인에게 고용된 마을 장정들은 산적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악덕 상인에 의한 마을의 지배라는 문제를 풀 수는 없습니다. 이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마을 장정들은 상인의 분노를 피하거나, 상인에게 아첨하여 더 많은 보수를 받거나, 억울한 대접을 받아도 참는 개인적인 방식으로 대처합니다. 자기가 대처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사람은 그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바꾸어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 들 때 이야기의 초점은 사회에 맞추어집니다. 반면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바꿀 때는 이야기의 초점이 개인에게로 옮겨집니다. 이런 "입장의 차이"는 캐릭터의 파워레벨에 따라 정해지는 면이 많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일 수록 사회적인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도 쉽고, 그럴 능력이 없으면 문제를 "개인화"하는 쪽, 즉 피하거나 이용하거나 참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실피에나 캠페인에서 진행의 초점은 둘 중 어느 쪽에든 둘 수 있고, 어지간한 캠페인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모두 등장할 것입니다.
온갖 구조적 문제가 산재한 실피에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조건"이 필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문제가 능동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 아니면 최소한 당장은 손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 "기정사실"이니 확실하게 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마치 흉작을 해결하려는 농부가 날씨를 바꾸려 들다가 실패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 되어 쓸데 없는 무력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눈앞의 문제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입장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주: 이번 플레이에선 가능한 사회적 문제의 대처/해결 쪽에 비중을 실으려 합니다. 물론 캐릭터로선 어찌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무력감을 느끼는 면은 줄이려고요. :D)
대부분의 난민들은 717년 우르고로스 화산 분화와 대지진, 기상 이변으로 마을과 농토를 잃은 농어민입니다. 상당수가 우르고로스 지역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지만, 비산트와 엘메리아 각지에서도 오로라이트 유적을 중심으로 소규모 분화와 지진, 산사태가 일어나 난민이 된 이들이 적잖습니다. 뒤이은 혼란과 전화(戰火), 유적충의 출현으로 터전을 잃은 경우도 있을테구요.
난민들은 길드타운 외곽에 급히 건설된 공동주택에 살고 있습니다(공사비를 횡령해 부실공사를 했다는 소문도...). 3-4층 높이의 공동주택 한 채에 15-25가구 정도가 살며, 20여 채의 공동주택이 하나의 단지를 이룹니다. 단지에는 식료품과 일용품을 판매할 점포도 유치되어 있지만, 난민들의 생활고가 심한 만큼 매상은 신통찮습니다.
난민들은 대부분 농업, 목축에 가내수공업 조금 하던 외에는 특별한 기술이 없습니다(오로라이트 광산촌 출신도 있지만 형편은 마찬가지). 대부분 나무를 해서 내다팔거나, 접시닦이/청소, 물 지게 등 허드렛일을 하거나,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거나 짐꾼으로 일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나마도 자리가 없어 매일 이른 아침 난민지구 입구의 인력시장은 푼돈이라도 받고 일할 실업자들로 들끓습니다. 손재주가 있는 아이들은 드물게 길드타운 상공인들이 심부름꾼이나 도제로 쓰기도 하는데, 아주 운이 좋은 경우 뿐입니다. 범죄에 손대기 쉬운 난민의 특성상 편견과 의심도 심하고, 원래 있던 식구와 도제들을 챙기는게 우선이니까요.
삮바느질 같은 일거리도 없는 난민들은 초라한 노점상을 펴거나 구걸도 합니다. 이런저런 재주를 선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밤중에 몰래 강으로 나가 무허가 어업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계가 힘겨운 만큼, 범죄에 손대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매치기, 좀도둑, 빈집털이로 시작해서, "퍽치기"나 강도까지 점점 범죄 강도도 심해지고 있습니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각종 사기나 도박, 폭력 사건에 난민들이 관여되는 경우도 많고요. 난민 "밀어꾼"들이 부두의 배에 숨어들어 화물을 훔치거나, 밀수를 벌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주로 길드타운 시민으로 구성된 자치수비대는 난민지구 순찰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난민들로 구성된 자경조직이 보호세를 갈취하고 구호물자를 빼돌리는 폭력조직으로 변질되는 조짐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도 "난민대책위"가 세워지는데 일조했습니다)
결국 난민들이 제자리를 찾는 길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 정착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총독부가 공단에 신식공방을 유치하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지만, 현재는 십여 개 남짓의 크고 작은 공방 뿐입니다. 그나마도 화살, 창, 방패, 가죽갑옷과 천막, 건량 등을 생산하는 군수품 업자들을 반강제로 몰아붙인 결과입니다. 여기 취직한 난민들은 그나마 생계수단 면에서 낫지만, 이 일자리를 둔 분쟁도 암암리에 벌어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두번째 모임에서 캐릭터 조율을 하면서, 길드타운 난민대책위원회(;;) 이야기를 플레이해보기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야기된 설정들을 정리해서 살을 덧붙여봅니다.
* 주요 소재: 난민 문제와 신식 공방 도입을 둘러싼 갈등.
길드타운에 몰려든 2만여 난민들. 도시에서 허드렛일이나 막노동 자리도 못 구해 생계가 막막한 이들이 태반입니다. 절박한 난민들 사이로 범죄도 늘어가고... 총독부는 어떻게든 시의회를 설득해서 공단에 신식공방을 유치하려 하지만, 토착 상공인들의 태도는 완강합니다. 결국 난민 문제를 두고 끈질기게 격론이 이어진 끝에, 관민 공동의 난민대책위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일종의 임시기구+NGO 성격).
난민들의 생활문제와 범죄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자..는 취지지만 각자 정치적 의도도 있습니다. 총독부는 어떻게든 난민문제를 부각시켜서 신식공방 사업을 추진하려는 기대를 품고 있고, 반대로 시의회/길드들은 난민대책위로 '우리도 할만큼 했다'식으로 짐을 덜 심산입니다. 자치수비대는 보다 난민 문제 해결 자체를 지향하지만, 아무래도 난민 범죄문제의 확산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고요.
난민대책위는 난민들에 대한 구호사업, 취업 촉진 등과 더불어, 관련 분쟁/범죄/비리 사례를 조사, 중재할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난민 문제의 실태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것 역시 장기적인 역할이겠죠. 일단은 신식공방 도입에 대해선 각기 다른 생각들을 가질 수 있지만, 이 부분도 진행되어가면서 어느 편엔가 서야 할 터입니다.
현재는 총독부의 담당관료가 총괄하고, 각 난민 지구별로 3-4인의 팀이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난민이 겪는 생활고와 차별대우, 구호물자 배급을 둘러싼 분쟁, 난민 관련 범죄조직, 난민 고용 관련 분쟁, 그리고 폭동의 조짐.. 등이 이야기 거리가 될 거 같아요. 아이디어 있으시면 덧붙여주세요- :)
@ 다음주부터는 난민대책위 사무소 개소식과 더불어 첫 활동을 개시해보도록 하죠^^;